본고는 발해의 위상정립을 위하여 정치, 문화, 외교, 계승의식을 다루어 볼 것이다.
정치면에서는 지방제도를 다루어 고구려와 중복되는 지역의 통치와 각 지방에서 외교시에 사용했던 교통로를 통해 발해의 지방통치제도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문화면에서는 발해건축 중 온돌과 고분을 통해 그 안
본원리가 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타일러 에 의하면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추리되어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가령 잠자고 있는 동안 몸은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도 멀리 떠나 있는 꿈을 꾼다거나, 또는 죽음 직후에는 외관상 아무 변화는 없으나 살아 있을 때
지방의 대가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낙동강이 신라와 가야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고, 수로교통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김해의 금관가야는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보면, 금관가야 주도의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 이후 5세기 가
본인 삼강오륜을 강조하고, 과거제도도 유교사상을 모르면 합격하지 못하게 하여 유학의 공부를 장려하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로 봤을 때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한 이유가 개국의 정당성을 정립하고 나라의 기강과 사상을 확립하기 위해 유교를 채택하였고, 또한 조선 공신들의 세력이 성리학을
신라의 병합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고(936). 다음 해에는 후백제의 신검을 공멸하는데 성공하여 완전히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는 건국과 함께 중앙관제를 정비하였다. 지방관제도 중앙관제가 확립되어 가던 성종 2년(983)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현종 9년(1018)에 일단락되었다. 고려의 지방관제 개편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왕에게 고하기를 “왜인이 우리 국경에 가득히 들어와서 城池를 파괴하고 있으니 구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신라를 구원하기 위한 마치 종주국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정한다는 것이다. 이엉 영락 10년인 400년에 5만의 대병력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했는데, 그
신라와 당을 이어주는 해상교통로의 요충이며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동아시아 삼국간의 무역을 통하여 크게 성장한 장보고세력이 가장 좋아할 근거가 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특히 산동반도는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의 번진이 55년간이나 군림했던 매우 이질적인 곳이다.
세력의 성격은 다음의 유형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성은 삼국의 영역적 지향성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토대가 된다.
① 외부의 선진적 정치사회를 경험하고 선주민사회보다 조직력, 도구적 측면이 우월하다.
② 유이의 시작에서 정착하기까지 비우호적 세력들과 갈등하여 군사집